세계일반

영국 의회, 700년 묵은 ‘귀족 의원’ 전원 퇴출 결정

2026-03-12 16:57
 영국 민주주의의 심장부에서 7세기에 걸친 오랜 전통이 마침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혈통을 근거로 입법 권력을 대대손손 물려받던 상원의 세습 귀족 의석이 완전히 폐지되면서, 영국 의회는 중대한 역사적 전환점을 맞이하게 됐다. 이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상징이었던 낡은 유산을 청산하고 현대 민주주의 원칙을 향해 나아가는 결정적인 발걸음으로 평가된다.

 

영국 의회는 국민이 직접 선출한 하원과 비선출직으로 구성된 상원의 양원제로 운영된다. 상원은 법률을 심의하고 정부를 견제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만, 그 구성 방식은 늘 민주적 정당성의 문제에 직면해왔다. 과거 귀족과 성직자들만의 전유물이던 상원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종신 귀족 제도를 도입했지만, 여전히 92석의 세습 귀족 의석이 존재하며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번 개혁은 사실 25년 전부터 시작된 긴 여정의 마침표다. 1999년 노동당 정부는 대대적인 개혁을 통해 600명이 넘는 세습 귀족의 의원직을 박탈했다. 다만 당시 기득권층의 거센 반발과 급진적 변화에 따른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92석을 임시로 남겨두는 타협안을 마련했는데, 이번 법안 통과로 이 예외 규정마저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이다.

 

세습 귀족 제도의 폐지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요구였다. 부모의 신분에 따라 국가의 법을 만드는 막강한 권한이 자동으로 주어진다는 것은 평등과 민주주의의 가치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최근 일부 상원 의원들의 성범죄 연루 의혹과 같은 윤리적 일탈 행위가 잇따라 터져 나오면서, 낡은 특권을 폐지해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는 더욱 확고해졌다.

 


물론 700년 전통의 소멸을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세습 귀족들은 선거를 의식할 필요가 없어 단기적인 여론이나 당파적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국가의 장기적인 이익을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는 순기능을 강조한다. 이들은 수많은 법률을 개선하는 데 기여해왔다며 자신들의 역할과 봉사를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고 항변한다.

 

이번 법안은 찰스 3세 국왕의 최종 재가를 거쳐 정식 법률로 공포될 예정이다. 이에 따라 마지막까지 의석을 지켜온 92명의 세습 귀족들은 오는 5월, 현재 진행 중인 의회 회기가 종료됨과 동시에 700년 역사의 무대에서 영구적으로 퇴장하게 된다.